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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慰勞),consolation

서울의 봄, 실존인물들 그후의 이야기(4) 빌런모음 - 노재현 국방부장관(오국상 :배우 김의성), 윤성민 육군참모차장(민성배 : 배우 유성주)

by SmiteStitch 2023. 12. 3.

목차

    서울의 봄을 보고 난 후

    1979년 12월 12일 군부쿠데타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픽션으로 치부하기에는 역사서에 가깝게 고증하려 노력했던 영화이므로 대부분의 줄거리는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을 거라 생각하고 영화의 스포가 되는 사실들은 제외하고 이 영화에 나온 주인공들과 매칭이 되는 실제 인물들의 영화의 시대적 배경 이후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 - 오국상(배우 김의성)

    아마도 전두환과 필적하는 혈압상승유발 빌런이 아닐까 하는 오국상 국방부 장관입니다. 모티브가 된 인물은 노재현 전 국방부장관이죠.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임관, 30 사단장, 육군군수사령관, 육군본부 감찰관,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1972년 육군참모총장에 오릅니다. 1975년 합참의장까지 지낸 후 전역 후에 국방장관에 임명됩니다.

     

    1979년 12.12 사태 때 국방장관 공관에 있다가 인근의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가족과 함께 공관에서 빠져나와 단국대로 도망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은 부하의 집에 피신시키고 육군본부 B-2 벙커로 이동하여 상황보고를 받은 후 미 육군 8 군영 내의 한미연합군사령부로 피신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가장 밉상캐릭터로 그려졌는데요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덜덜 떨다가 미군사령관에게 한소리 듣고 난 후 어딘가를 배회하다 뒤늦게 육본으로 온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신 국방부 장관에게는 군대를 이동시킬 합법적 권한이 없었기에 전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한미연합사령부가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상태이므로 대통령이나 한미연합사의 동의가 필요하였기에 접근할 수 없었던 대통령이 아닌 한미연합사를 설득하여 육본을 지킬 군대를 출동시키고자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다가 반란군에게 붙잡혀 반란군의 편을 들며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것은 분명 국방부장관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무능력함을 표현해낸 김의성배우의 찰진 연기로 아주 밉상스러운 말투와 행동을 통해 수백만의 사람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 일등공신의 유능력을 보여줍니다.

     

    영화 이후의 행적

    아군끼리의 유혈충돌은 막고 수습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대통령이 재가하도록 조용하고 일련의 사건에 책임을 지고 직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그에 대한 보상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1981년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맡았으며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에도 취임하고 1982년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에 선출됩니다. 1988년 화학연구소 이사장직과 비료공업협회 회장직을 모두 사퇴하고 1991년 제2대 한국자유 총 연맹 총재에 선출되며 1995년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을 역임합니다.

     

    GS건설 허명수 대표이시장의 장인이며 2019년 9월 25일 93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납니다.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 민성배 중장 (배우 유성주)

    육군사관학교 9기로 1950년 1월 소위로 육군에 임관합니다. 이후 제1야전군사령부 인사처장, 주원사령부 참모장, 제5보병사단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1977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3군단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며 김재규 중장정보부장이 공석이 되어 당시 육군참모차장 이희성이 임시 직무대리로 자리를 옮기고 윤성민이 육군참모차장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맞이하는 것이 영화 서울의 봄에서 다루는 12.12사태입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되자 자동으로 육군본부의 2인자로서 육참총장 직무대행이 되고 진압의 총지휘를 맡아야 하는 임무를 갖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윤성민은 그래도 재빠르게 지휘부를 비상 소집하고 전방의 제3야전군사령관, 제1야전군사령관과 연락하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등과 반란군을 진압할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이렇듯 초반의 대처는 적절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란군집압 방법에 대해 내전은 안된다 최대한 유하게 해결하자는 의견과 북침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하여야 한다는 강경파적 의견에 대립 속에 초반의 적극적 대응과는 달리 시간이 경과할수록 유혈사태는 피하자는 의견에 수렴하여 결국 12.12 반란의 성공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시종일관 반란군의 반란의 성공을 기원하는듯한 명령하달과 군병력이동에 훼방을 놓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또한 육본을 나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하는 모습등은 초반의 기민한 대응과는 달리 반란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단서를 제공했다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이후의 행적

    12.12사태 후 수도경비사령관실에서 수경사 헌병대장 신윤희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국군보안사령부의 서빙고로 연행되어 갔지만 13일 새벽 전두환, 유학성 , 차규헌 등의 권유를 수용하여 육군 제1군 사령관 직무대리에 보임되고 11일 후 12월 24일 육군 제1군 사령관직에 취임합니다. 1980년 5월 20일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합니다. 또한 1981년 5월 15일 제17대 합동참모의장 겸 대간첩대책본부장으로 임명되고 1982년 5월 21일부터 1986년 1월 8일까지 제23대 국방부장관을 지냈습니다. 전두환정권하에서 가장 오랫동안 국방부장관직을 수행한 사람으로 전두환의 허수아비였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퇴임 후에는 대한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 회장, 현대정공 상임고문, 자민련 특임위원등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문민정부시절 1996년 6월 27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30부에서 열린 12.12 및 5.18 사건 17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12.12사태에 대해 "비상계엄하에 일선 주요 지휘관들이 숙소를 이탈해 영장 없이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고 부대 병력을 동원해 주요 사령부를 강점한 것은 군권을 찬탈하기 위한 명백한 반란행위"라고 증언합니다. 이에 대한 신군부 변호인 측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데요. 이러한 비난은 일반국민들에게서도 피할 수 없는 비난일듯합니다. 

     

    2017년 11월 6일 서울에서 숙환으로 사망하며(91세), 11월 9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모든 요직에 그 임무를 완벽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을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또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개인적 집단적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공적으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사람일 가능성까지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래사장의 바늘 찾기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 군부대등 모든 국민의 생명과 복지에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라면 능력, 도덕 둘 중 하나라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 그 임무를 담당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오늘의 포스팅이었습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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